Yves Montand (이브 몽탕)

1921년 10월 13일, 이탈리아의 밀라노 근교 몽스마노에서 유태인 빈농의 3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보 리비(Ivo Livi). 그가 늘 남다르기를 바랬던 어머니는 이브 몽탕(Montand은 up의 뜻이다)이라고 불렀고, 결국 이 이름은 그의 예명이 되었다. 몽탕의 가족은 몽탕이 태어난 지 불과 2년 후에 프랑스로 이주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이 활개를 치던 시대여서, 유태인이었던 그의 가족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채 프랑스로 도망가야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르세이유의 뒷골목에 터전을 마련했으며, 이 후 가난하게 살게 된 몽탕은 11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밀가루 공장 등에서 여러 힘든 일을 해야 했다. 2차 대전시에는 조선소에서 혹독한 노동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는데, 그에게 가수로서의 희망과 꿈을 안겨준 계기는 그의 누나였다. 누나가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조수로 일했던 몽탕은 그의 누나가 만들어내는 여러 머리 모양이 마냥 신기했고, 누나로부터 열이 머리 모양을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 그 열같은 의지만 있다면 자신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여자들이 미용실에서 나누는 대화가 대부분 자신의 속내와 연예인에 대한 것인 줄 알고는 이내 연예인이 되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 뒤 몽탕은 삼류 극장을 드나들며 여러 가요 대회에 참가하는 등 연예인으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게 되며, 노래에 대한 재능을 차츰 인정받아 1939년 마르세이유의 이르가자르에서 데뷔하게 된다. 청운의 꿈을 안고 파리로 올라온 몽탕은 2차 대전 당시인 23세 때 파리의 물랭 루즈에서 노래부르다가 에디트 피아프의 눈에 띄어 그녀의 지원을 받아 성장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한다. 사실 그는 가수와 배우로서 두 가지 삶을 살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몽탕이 배우로서 더 이름이 높은데, 그에게 배우로서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52년작인 “공포의 보수(Les saliere de la neur)“였다. 앙리 조르쥬 크루소 감독의 이 작품에서 다이너마이트의 원료인 니트로 글리세린을 운반하는 운전사역을 맡아 호연하여 가수로서 뿐만 아니라 배우로서의 입지도 확고히 한다. 그가 가수로서 전세계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그의 대표곡으로 남은 고엽 또한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 흘러나왔다. 1946년 클럽에서 노래 부르던 몽탕을 보고 마르셀 카르네 감독과 대본을 쓴 시인 자크 프레베르가 몽탕에게 영화 ”밤의 문(Les portes de la nuit)“의 출연을 제의해왔다. 당시 주역은 장 가방이었는데, 그가 영화 출연을 거절하는 바람에 몽탕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실패했다. 다만 그가 극중 부른 두 곡의 샹송, 고엽(Les Feuilles mortes)과 사랑하는 아이들(Les Enfants qui s‘aiment)만이 그에게 남겨졌다. 이 후 고엽은 50년에 레코드에 실리게 됨에 따라 전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어 모든 이들의 가슴에 몽탕과 고엽은 같은 이름으로 남게 되며 몽탕에게 가수로서의 명성을 안겨준다. 밤의 문 출연 당시 몽탕은 피아프와 살고 있었지만, 이들은 헤어지게 되었으며 몽탕이 시몬 시뇨레와 결혼하므로써 몽탕과 피아프와의 관계는 확실히 정리된다. 우아하고 교양있던 시몬 시뇨레와의 결혼은 밤의 문이 실패한 이후 실의에 차 있던 몽탕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며 1953년 공포의 보수에 출연함으로써 가수와 배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한다. 그의 대표 출연작들은, 밤의 문(56년), 공포의 보수(52년), 나폴레옹(54년),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55), 인간과 늑대(56년), 사랑을 합시다(60년),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65년), Z(68), 고백(69년), 계엄령(72년), 파리의 정사(73년) 등이다. 몽탕은 1991년 11월 9일, 프랑스 북부 상 리스에서 장 자크 베넥스 감독의 영화 ”IP 5"를 찍던 중 갑작스런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992년 5월 파리에서의 대규모 콘서트까지 예정되어 있던 터였다. 소방차로 실려가는 도중에 몽탕은 같이 타고 있던 소방관에게 아무것도 후회할 게 없을만큼 충분히 살고 그 삶을 겪었다고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 전체는 그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그가 살던 아파트에는 조화를 든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모든 프랑스 방송이 며칠동안 거의 그의 일대기를 방송했으며 미테랑 당시 대통령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