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t Baker (쳇 베이커)

쳇 베이커는 오늘날까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앨범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재즈 뮤지션 중 하나이며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이에게 공감이 가는 음악을 선사하고 있는 재즈의 명인이다. 가장 싫어하는 뮤지션을 '윈튼 마샬리스'라고 말할 정도로 뛰어난 테크니션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쳇의 음악에는 기술적으로 세련되거나 인위적인 부분이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그처럼 내면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뮤지션은 드물다. 불안정하며 깊이가 없어 보이지만 어느 뮤지션에게도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감성이 존재한다. 또한 쳇은 가장 슬픈 목소리와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재즈 뮤지션 중 하나이다. 청자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깊은 감성을 자극하는, 바로 그가 늘 말해왔던 영혼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으며, 이는 그의 음악이 현재까지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있는 가장 커다란 이유이기도 하다. 쳇 베이커는 1929년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컨트리 뮤직 밴드의 벤조연주자였고,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불안전한 음악가의 수입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결국 뮤지션의 길을 포기하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공장직공으로 일을 하게 된다. 11세 생일날 쳇은 아버지로부터 싸구려로 트럼펫을 선물 받는다. 그 때부터 트럼펫을 연주하는 행위는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악보도 제대로 읽지 못했지만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은 그를 단기간 내에 트럼펫의 천재로 만들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쳇은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연주실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2년간의 군복무가 끝난 후에 그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근처의 아마추어 재즈 클럽에서 활동하던 중 찰리 파커 밴드의 트럼펫 연주자로 발탁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정도로 잘생긴 용모와 뛰어난 연주실력으로 쳇 베이커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고, 이후 스탄 게츠, 게리 멀리건 등과 같은 거물급 연주자들과 함께 웨스트 코스트 재즈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성장하게 된다. 짧은 시간내에 부와 명예를 누렸던 그였지만 그의 타고난 방랑벽은 자신의 인생을 비극으로 곤두박질 치게 만든다. 복잡한 여자관계, 특히 마약에 대한 지나친 탐닉은 그를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뮤지션의 위치에서 빈곤과 허무가 가득찬 파멸의 인생으로 이끌게 된다. 무책임한 연주활동과 방탕한 사생활은 재즈 뮤지션으로의 위치 뿐만 아니라 용모도 비참하게 만들었다. 40살 되던 해에 그는 불량배들에게 폭행을 당해 앞니가 완전히 부셔져 버리는 사고를 당했다. 트럼펫 연주자로서는 치명적인 사건 이었지만 그는 틀니를 하고 트럼펫을 연주하는 투혼을 발휘하게 된다. 특히 지나친 마약으로 그의 용모는 일반인보다 몇 십년은 더 늙어보였다. 쳇의 중반기 이후의 활동은 거의 유럽의 여러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마약에 대해 관대한 유럽의 환경, 특히 한때 잘 나갔던 나이든 뮤지션에 대한 대중들의 태도는 미국보다 유럽의 재즈팬들이 더욱 환호적이기 때문이었다. 중반기 이후 대부분의 앨범이 유럽의 마이너 레이블에서 발매됐거나 부트랙이 많은 이유도 그 중의 하나이다. 연주활동과 마약이 전부였던 말년의 삶은 1988년 암스텔담에 있는 호텔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하며 마감하게 된다. 당시 쳇은 적지않은 공연수입을 올렸었지만 그가 남긴 것이라곤 약간의 돈과 마약 그리고 간단한 소지품 뿐이였다. 그의 시신은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옮겨 졌다. 장례비용 조차 그의 가족이 부담할 수 없어서 쳇의 친구들이 경비를 대었으며 장례식은 그의 가족과 친구 몇 명 만이 모여 초라하게 치루어졌다. 중반기 이후에 녹음되었던 쳇의 음악들은 그의 비극적인 삶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런이유로 뛰어난 연주기교를 보이던 웨스트 코스트 시절의 음악보다는, 유럽에서 활동하였던 시기의 작품들이 그의 음악적 특징을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고, 실재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그의 라이브 실황은 놀라운 관심의 대상이다. 언제나 지독한 마약 중독으로 최상의 컨디션 유지가 불가능하였지만 그가 남긴 대부분의 라이브 앨범은 놀라운 집중력과 감수성을 보여주는 최상의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한 뮤지션이 살아 왔던 인생과 그의 음악성을 연계시키는 부분은 청자들이 판단하여야 할 몫이다. 다만 아메리칸 흑인의 밑바닥 생활에서 비롯된 재즈의 원초적 발생에 비추어 볼 때, 쳇 베이커의 인생은 재즈의 본질과 상당히 밀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는 실패한 밑바닥 인생을 살았지만, 재즈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한 진정으로 성공한 뮤지션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