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ur Schnabel (아르투르 슈나벨)

폴란드의 리프니크에서 출생한 오스트리아계의 미국 피아니스트. 어릴 적 빈으로 가서 한스 슈미트를 2년간 사사했으며, 다시 1892년부터 7년간 당대 최고의 피아노 교수였던 레세티츠키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당시 슈나벨의 연주를 들은 브람스는 '앞으로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할 것이다'라고 극찬했다고 전한다. 빠른 속도로 레파토리를 확장해 나간 슈나벨은 당시로서는 거의 연주되지않고 있었던 슈베르트의 소나타, 베토벤의 바가텔과 변주곡 등을 연주함으로써 큰 호응을 얻었냈다. 공식 데뷔는 1890년이었으며 주로 베를린을 본거지로 연주 활동에 임했다. 당시 거의 모든 피아니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슈나벨도 실내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어서 칼 플레쉬, 후고 베커, 파블로 카잘스, 엠마누엘 포이어만, 피에르 푸르니에, 파울 힌데미트, 요세프 시게티 등은 그와 함께 실내악을 연주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외에도 프로아르테 쿼텟과는 오랜 동안 같이 연주하면서 많은 음반을 발표한다. 슈나벨은 전성기 때부터 베토벤의 귄위자로 이름이 높았는데, 세계 최초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 것도 그였으며, 1927년 베토벤 서거 100주기 기념 공연에서는 서른 두 개의 소나타를 연속 연주해서 대단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아놀드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를 초연하기도했던 슈나벨은 1925년부터 30년까지 5년동안 베를린 음악 학교의 교수로서 클리포드 커즌이나 페터 프랑클 같은 명피아니스트를 길러내지만 나치가 정권을 잡자 독일을 떠나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연주 활동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의 레퍼토리가 미국인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럽에서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전쟁이 끝나자 스위스로 거처를 옮겼으며 195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녹음과 연주 활동을 병행했다. 슈나벨은 베토벤 연주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그의 베토벤 연주는 오래 전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레퍼토리는 그렇게 많지 않아서 베토벤 이외에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가 거의 전부였고 독일계 작곡가의 작품이외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작은 레퍼토리 가운데서도 그가 연주하는 모든 곡은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호로비츠처럼 외향적인 일면이 있다거나 박하우스처럼 엄격한 분위기가 풍기지도 않았지만 한 마디로 중용의 미덕을 한몸에 지닌 피아니스트 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채로운 활동을 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특히 제자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야기들은 그의 인간적 풍모와 음악관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슈나벨은 제자의 연주가 끝나면 세 가지 코멘트를 남겼다고 한다. 'Very Good, Well, Bravo'가 그것이었는데, 각각은 이면에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보면 '브라보'이상의 찬사가 없겠지만 슈나벨은 이 말을 가장 실망스러웠을 때 했다고 한다. 즉 테크닉에만 매달린 나머지 음악성이 무시된 경우를 비꼬는 말이었다. 기교보다는 작품의 내면을 궤뚫는 음악적 능력을 최상으로 여겼던 슈나벨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연주회에서 비롯된 일화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다. 브루노 발터와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던 중 2악장에서 그만 악보를 잊어서 연주가 중단된 일이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발터의 모습과는 달리 슈나벨 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잠시 잊어 버린 스코어를 묻고는 유유히 연주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그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잠시 연주가 중단된 것을 제외하고는 너무도 훌륭한 연주였기 때문이다. 기교보다는 음악성을 앞세운 인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운 일화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