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o Del Monaco (마리오 델 모나코)

황금의 트럼펫 마리오 델 모나코. 금세기 최고의 오텔로 가수로 트럼펫 같은 강렬한 음색을 들려 주었던 마리오 델 모나코는 1915년 7월 27일 이태리 피렌체 시의 리카졸리 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토레 델 모나코는 나폴리 출신으로 오페라를 아주 좋아했고 뉴욕의 이태리계 신문에서 음악평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 플로라 지아케티는 좋은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고 엔리코 카루소의 부인과 사촌지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롯시니 음악원의 바이올린과에 입학시키려고 했으나 델 모나코 본인은 별로 흥미가 없었다. 이 무렵부터 그의 변성기가 시작되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노래를 불렀던 그는 14세가 되었을 때 마스네의 신성무대극 <나르치조>에 뽑혀나가 출연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미성과 아들을 오페라 가수로 만들려던 아버지의 결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림 그리기에 취미가 있어 화가가 되려고 마음 먹었다. 후기 중학교(진나지오)를 졸업한 후, 페자로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디플로마를 땄고 울비노에 있는 학교에서도 그림으로 디플로마를 땄다. 그러다가 18세가 되었을 때 노래에 대한 정열이 생겨 그림 공부는 그대로 계속 하면서 페자로의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그 곳에서 멜로키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멜로키 선생은 툴리오 세라핀의 친구였으며 엄격한 교수법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계 각지의 유명한 성악가들이 그에게 노래를 배우러 왔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는 개인 교습에서는 레슨비를 한푼도 받지 않았고 오히려 뛰어난 고음을 내면 에스프레소를 대접해 주었다. 멜로키 선생은 델 모나코가 유명해진 뒤에도 라디오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음성에 대한 주의 사항을 상세히 적은 긴 편지를 써 보냈고 80세 때는 일부러 스칼라 극장까지 찾아가 공연이 끝난 뒤 갖가지 충고를 해주었다고 한다. 페자로 음악학교에서 멜로키 선생의 지도 덕분에 1년만에 풍성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36년에 로마에서 있었던 콩쿠르 참가해 입선하였다. 곧이어 그는 로마 오페라 극장의 연구생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연구생의 지도를 맡은 마르칸토니 선생은 클라리네트과의 교수인 관계로 성악을 잘 몰라서 그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고 갔다. 마르칸토니는 델 모나코가 성량은 아주 크나 62킬로의 마른 체구여서 목소리와 몸이 안 어울린다며 그에게 소리를 작게 내도록 가르쳤다. 레지에로의 테너로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몇 달이 지나자 그는 가는 소리를 내게 되었는데 이것을 의식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1938년에 페자로에 있는 멜로키 선생에게 다시 찾아갔는데 선생은 델 모나코가 배신했다고 생각하여 냉대했다. 용서를 받은 뒤 그의 지도로 다시 본래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1938년 델 모나코는 밀라노의 피렌체 광장에 있던 제3자동차 부대에 입대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되돌아 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리고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병영에서 목소리를 되찾는 연습에 들어갔다. 처음엔 동료들이 야유를 퍼부어댔으나, 그의 노래를 들은 연대장 지노 닌키의 인정을 받아 그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되었다. 닌키 대령은 델 모나코의 목소리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공동침실이 아닌 난방 시설이 되어있는 의무실에서 자게 했다. 그러자 동료 병사들도 델 모나코의 노래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고 트럭으로 이동할 때 노래를 불러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노래를 불러 줄 때도 발성 연습에 도움이 되는 노래만 불렀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는 러시아 전선으로 전속 명령이 났는데 닌키 대령은 그가 이태리에 머물도록 힘을 썼다. 그래서 이태리에 머물라는 특명을 일주일 뒤에 받게 되었다. 군 복무 와중에 그는 푸치니 극장에 리허설을 받으러 가서 심사위원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내 <나비 부인>의 공연 계약을 맺었고, 1940년 4월 26일에 데뷔했다. 첫 무대에서 좋은 평을 받아 그 시즌의 <나비 부인> 전 공연과 <춘희>의 두 공연을 계약했다. 그 이후로 계속 군인의 신분으로 시칠리아, 밀라노 등지에서 노래를 불렀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 이어 트리에스테와 이탈리아의 각지에서 노래했고 1946년에는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아이다>의 라다메스를 불러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1948년에는 코벤트 가든의 무대에 섰다. 1949년에는 스칼라 좌에 <안드레아 쉐니에>역으로 데뷔했는데, 표가 매진되어 미쳐 표를 못 구한 사람들이 돌아가지 않아 극장 밖에다 스피커를 몇 개 설치해 놓고 광장의 군중들이 노래를 들을 수 있게 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이 성공 이후 델 모나코는 세계 최고 인기를 누리는 성악가로 군림했으며 특히 베르디의 <오텔로>의 해석에 탁월했다. 그는 일생동안 부르기 어렵다는 오텔로를 427회나 공연했으며 종합적으로 그는 2000회 이상 오페라에 출연했으며 전곡 레코딩을 30종이나 남겼고 라이브 녹음 및, 아리아집 등은 수십 종에 이른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위기를 맞은 것은 1964년이었다. 로마에서 집으로 가던 도중, 운전 중에 자동차의 보닛이 열려 앞을 가로막아 핸들을 잘못 돌려 앞차를 받았다. 온몸이 엉망진창이 되어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왼쪽 다리 등 8군데가 부러졌고 20여일을 산소 호흡기 속에서 지냈다. 거기서 겨우 회복되어 가던 중 그는 또 간염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서 체중은 20킬로가 빠졌다. 퇴원해서 집으로 왔으나 다리는 완치되지 않았고 무릎의 관절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발목부터 아래부분은 마비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는 무대 컴백은 불가능했으나 그는 단념하지 않았다. 집안이나 정원에서 다리를 끌면서 걷는 연습을 시작하였고 매일 운동을 계속 하는 사이에 무릎 아래의 근육이 튼튼해졌으며 무릎 관절도 좋아졌다. 그래도 발목 이하는 여전히 마비상태였다. 주위에서 단념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노래 연습에 들어갔다. 몇 달 후 발목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소리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재기에 성공했던 것이다. 델 모나코가 위대한 오페라 가수가 되기까지는 그의 아내 리나의 공이 컸다. 그는 그녀가 8살이었을 때 만났는데 그녀는 그의 아버지의 동료인 필리포 대위의 딸이었고 언제나 영양의 일종인 가젤과만 놀고 있던 아이였다. 그가 로마 오페라 극장 연구생으로 있을 때 리나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소프라노였고 둘은 같이 성악을 공부했다. 리나는 델 모나코에게 잘못된 성악 지도를 하던 선생에게 항의를 해서 장학금을 못 받게 되기도 했다. 리나의 아버지는 장래에 아무런 보장이 없었던 델 모나코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자 리나는 짐을 꾸려 가지고 밀라노에 와서 자립했다. 그녀는 델 모나코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며 그를 뒷바라지했다. 그가 군인 신분으로 노래하고 있을 때 오디션을 부탁하러 극장을 찾아다닌 것도 그녀였고 그가 최초로 데뷔했던 푸치니 극장의 오디션을 받게 알아봐 준 것도 그녀였다. 이렇게 훌륭한 아내의 내조가 있었기에 델 모나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델 모나코의 팬들 중에는 거물급들이 많았다. 소련의 후르시초프는 그에게 레닌 아카데미 훈장을 주었고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은 그에게 섬을 하나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티토 대통령은 자기의 별장이 있는 브리오니 섬으로 종종 초대해 주었는데, 언제나 자가용으로 국경까지 보내주었으며 섬에서는 자가용 모터 보트를 내 주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최고 문화훈장까지 수여했다고 한다. 전 세계 오페라 팬들에게 사랑 받았던 마리오 델 모나코는 61세에 은퇴했고 1882년 10월 16일, 심근경색의 발작을 일으켜 오후 5시 30분에 아내 리나와 아들 클라우디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이 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그의 아들 클라우디오 델 모나코는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 훌륭한 가수였으며, 특히 목소리 관리보다는 사업에 더 관심이 많은 요즘의 성악가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그는 공연 2주전부터 소리의 성대의 컨디션을 위해 아무와도 말을 하지 않았고 필요하면 메모를 했다고 한다. 오페라가 끝난 다음에 곧바로 말을 하는 것도 해롭다고 공연 후엔 호텔로 달아나 조용히 지낼 정도였다. 이런 병적인 집착이 있었기에 그는 소리를 오래 보존할 수 있었다. 스테파노가 체력의 혹사와 무리한 레퍼토리의 확장으로 목소리의 쇠퇴기를 일찍 맞았던 것에 비하면 그가 얼마나 성실한 성악가였는지 알 수 있다.